[유카탄 여행] 툴룸 2: 툴룸의 해변가와 해골 세노테
도스 오호스 세노테에서 한참 놀다가 돌아와서 점심을 먹으니, 찌는 더위에 몸이 녹을 것만 같아 더 이상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여행하는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이런 더위가 아직 익숙치 않았고, 여기서 유일한 해결책은 자주 쉬어주는 것이다. 괜히 욕심 부렸다가 더위 먹으면 본인만 손해이기 때문. 잠시 숙소에 들어가서 선풍기 바람에 몸을 맡기며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드물게 해안가에 위치한 마야 유적 중 하나인 툴룸 유적 (Ruinas de Tulum)에 가기 위해 늦은 오후 길을 나섰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치첸잇사, 욱스말, 팔렝케 같은 유적은 다 정글 한복판에 있지만, 이 툴룸 유적은 탁 트인 바닷가에 있어 다른 마야 유적과는 다른 멋이 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툴룸 유적은 시내에서 도보로 이동하기에는 조금 먼 곳에 위치해 있다. 콜렉티보를 타고 이동할 수는 있지만, 나는 그 대신에 자전거를 대여해서 이동하는 방법을 택했다. 시내에 자전거 대여점이 몇 군데 있어 리뷰를 확인한 뒤 원하는 곳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선택했던 자전거 렌탈 샵. 숙소와 멀지 않아서 선택한 것이 주 이유이긴 했다. 하루에 150페소였나? 그런데 24시간 단위로 요금을 받기 때문에, 나는 툴룸 유적에 갈 때 이용하고 다음날 오전에 다른 세노테에 가기 위해 한번 더 이용하기로 했다. 툴룸 유적 자체도 옆의 해변들까지 방문하려면 상당히 넓어, 자전거를 가져가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긴 하다.
겨우 도착한 툴룸 유적. 막상 가보니, 5시까지 열려있다는 말과는 달리 3시 반정도에 입장을 마감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어버렸다. 숙소에서 밍기적거리지 말고 좀더 부지런히 움직일걸 그랬나 미련이 들었지만, 그냥 여기까지 온 김에 유적은 안 가더라도 그 주변의 해변이라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마 내가 갔던 2024년 여름에는 입장료가 저렴했었는데, 2025년부터 입장료를 상당히 올린 모양이다.
유적 입구에서 자전거의 핸들을 틀어 오른쪽으로 가면 쭉 뻗은 도로가 나타난다. 아무리 해변가라고 해도 정글의 티를 벗지 못한 나무들이 옆으로 뻗어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 해변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나온다. 여기도 자전거를 걸어둘 수 있는 거치대가 있어서 잠가 두고 해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바로 카리브해의 푸르름이구나. 사실 여름은 카리브해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아닌데, 허리케인에 휩쓸려온 해초들이 해변을 뒤덮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빛나는 백사장 대신 해초로 덮여 거무스름한 해변이 주로 보였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무리 해변이 지저분할지라도 열대의 해수욕은 참을 수 없는 유혹.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인데, 해변의 더러움이 무슨 소용이랴. 수많은 사람들이 아랑곳 않고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군함조가 해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나는 아침에 한참 물에 몸을 담갔기 때문에 넘어갔지만,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는 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저녁의 툴룸이 되었다. 덥고 습한 건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햇볕이 안 들어 돌아다니기에는 훨씬 나았다. 낮 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배출했던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맥주부터 한 잔 마시고 시작하자.
대충 바에 들어가 시킨 맥주 한잔. 점심으로 먹었던 모델로와는 다른 브랜드의 멕시코 맥주인 도스 에키스 (Dos Equis)로 골랐다. 두 개의 엑스라는 이름 답게 XX를 브랜드화한 것이 이 맥주의 포인트. 그런데 모델로가 더 맛있었다. 여기서는 따로 음식을 먹지는 않고, 타코를 더 먹고 싶어서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먹어보기로 했다.
음, 푸드트럭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타코가 저렴하지는 않았다. 시내 동쪽 외곽의 Súper Akí 슈퍼마켓 앞에 몇몇 타코 트럭이 있었는데, 하나에 무려 25페소를 받았다. 이 글을 쓰는 시기에는 1페소에 70원정도 하고 있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거의 80원이었으니. 달러를 쓰는 나에게도, 1달러에 20.3페소 정도 하는 이 시점과는 달리 내가 갔을 때에는 17페소대였기 때문에 더더욱 비싸게 느껴진 점이 있긴 하다. 아무튼 타코 4개에 한번에 강하게 자극하는 매운맛을 가진 초록 소스, 살사 베르데를 뿌려서 먹었다. 물론 맛있긴 하다.
다음날 아침, 툴룸을 떠나는 날이었다. 버스 시간은 오후에 있어, 그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기엔 아쉬워 세노테를 하나 더 방문하기로 했다. 이번에 방문할 세노테는 해골 모양으로 유명한 칼라베라 세노테 (Cenote Calavera). '칼라베라'라는 이름 자체가 스페인어로 해골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는 지난날 방문한 도스 오호스와는 달리 툴룸 시내에서 멀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고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름답게 해골이 그려진 벽화가 입구부터 있다. 도스 오호스보다 규모는 작았으며, 입장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여기서는 50페소 가량의 구명조끼 대여비를 따로 받았는데, 다이빙과 수영 실력만 있다면 굳이 구명조끼를 입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구명조끼를 입고 놀다가 나중에는 그냥 벗고 뛰어들었다.
두 개의 작은 구멍과 하나의 큰 구멍이 해골 모양으로 배치되어 우리를 땅 속으로 이끌고 있다. 이것이 세노테의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 3-4미터 정도의 깊이에 물이 있어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처음 다이빙을 할 때에는 그래도 꽤나 두려움이 몰려온다.
한 구석에 시발바 (Xibalba)라는 단어가 적혀있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아래의 스페인어 (Inframundo), 영어 (Underworld)의 해석과 같이 마야 신화에서의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나도 한번 지하세계로 뛰어들어보기로 한다.
다이빙을 해서 빠져든 지하세계에는 햇볕이 강하게 비치고 있었다. 물에 누워서 마냥 하늘과 나무만 쳐다보고 있었다는데, 동굴 바깥으로 바라본 풍경이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게다가 아침에 방문했더니 내가 첫 번째였는지,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신선놀음을 즐길 수 있었던 점이 최고였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이 조금 들어왔지만, 그래도 사람 없는 이 천연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후에 방문한 유럽인들과 사진도 찍어주면서 유카탄에 내려진 자연의 선물을 만끽할 수 있었다.
세노테 밖에서도 의자에 몸을 뉘어 일광욕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칵테일도 파는 것 같긴 한데, 아침이라 그런지 딱히 영업을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세노테를 한참 즐기고 시내로 돌아왔다. 7월의 유카탄은 너무 더운데, 에어컨이 나오는 곳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게 문제. 울며 겨자먹기로 스타벅스로 들어왔다. 당시 환율로 한국보다도 비싼 그란데 아메리카노였으나, 찬바람 맞으면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충할 곳이 여기밖에 없었던 게 문제. 발가락이 아파서 보니 세노테에서 놀면서 물이끼가 발톱에 잔뜩 끼어있었다. 억지로 빼내니 피까지 날 정도. 그 정도로 재미있는 세노테에서의 물놀이였다.
숙소에 돌아와서 짐을 뺀 뒤 길거리로 나섰다. 나름 관광도시인 만큼 길거리에 기념품점이 빼곡히 있었다. 살 생각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휘황찬란한 기념품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상점들을 지나면서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로 툴룸을 떠날 시간. 열심히 맛집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버스 출발시간이 임박해버려 그냥 터미널 맞은 편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퀘사디야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후다닥 식사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다음 도시로 향했다.